■ 경쟁스트레스 사회, 집단 따돌림 점점 어려진다 -동아일보|
A 군(5)은 최근 유치원에서 따돌림을 당한 이후 수면장애를 겪고 있다. '친하게 지내자'던 친구 B 군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게 '왕따'가 된 계기였다. 또래에 비해 덩치가 큰 B 군은 다른 아이들과 연합해 A 군을 거짓말쟁이라고 놀려댔다. 이 충격에 A 군은 밤에 잠을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야"라고 소리 지르는가 하면 소변마저 제대로 가리지 못하게 됐다. 최근에는 '틱 장애(Tic Disorder·특별한 이유 없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나 몸 등 신체 일부분을 빠르고 반복적으로 움직이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는 행동)' 증세까지 보여 유치원을 그만두고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 심각해지는 '유아 왕따'
과거 중고교에서나 문제로 여겨지던 왕따 문화가 최근 초등학교 저학년과 유치원생 사이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 따르면 왕따 등 학교 폭력을 초등학교 때 처음 접하는 비율이 2008년 56%에서 지난해 63%로 늘었다. 김주희 재단 상담팀장은 "집단따돌림 문화가 점점 저연령화되고 있다"며 "과거 초등학교 6학년 이상은 돼야 고민하던 왕따 문제를 요즘엔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들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5년간 학교 폭력 현황을 봐도 초등학교 내 왕따 등 학교폭력 건수는 4년 전에 비해 2.2배 늘어나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취학 전 조기교육이 보편화되면서 또래에 비해 어휘력이나 이해력,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왕따가 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스마트폰이나 TV, 인터넷을 접하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면서 욕설이나 폭력문화에 쉽게 노출된 아이들이 자연스레 왕따를 시킨다는 것. 임채홍 연세아이정신과 원장은 "여덟 살짜리 아이들이 서로 부모의 경제력을 기준으로 가난한 아이를 왕따시킨 사례를 상담한 적이 있다"며 "요즘은 어린 아이들도 성적이나 집안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왕따를 시키고 당하는 일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박성연 단혜아동청소년상담센터 상담원은 "유치원 때부터 시작되는 경쟁문화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또래관계에서 공격적으로 해소하려는 성향"이라고 분석했다.
외모나 신체적 특징도 왕따의 중요한 원인이다. 비만이나 성조숙증에 걸린 어린이는 특히나 왕따가 되기 쉽다. 최근 서울아동청소년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7세 여아는 유치원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돼지'라고 놀림을 받아 유치원 갈 시간만 되면 통곡을 하고 울기도 했다. 학부모 정모 씨(32·여)는 "성조숙증으로 또래에 비해 가슴이 발달한 여자아이가 유치원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이야기를 아이로부터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 가해 및 피해 어린이 모두 치유 필요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다 싸우면서 크는 거지'라고 왕따 현상을 방치할 경우 피해 아동은 성인이 상상할 수 없는 큰 정신적 충격과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고려대 교육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권재기 씨가 최근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초등학교 때 따돌림을 받은 아이는 중학교 진학 이후에도 정신적 치유가 되지 않아 우울과 자살 충동에 시달릴 수 있다. 권 씨는 "따돌림으로 인한 우울감이나 분노가 치유되지 않고 쌓일 경우 성장 과정에서 이상행동으로 폭발할 개연성이 크다"며 "초등학교 때만 따돌림 경험이 있는 학생들에게 별도 상담을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유치원생 가운데 또래에 비해 언어능력이나 사회성이 뒤떨어져 왕따가 된 경우 부모가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서둘러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김미경 성북아이정신과 원장은 "왕따 자녀를 둔 부모는 아이의 어떤 점을 개선해주면 좋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가해 아이의 경우 집이나 학교, 유치원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큰 것이 원인일 수 있다. 이현미 지오아동청소년상담센터 소장은 "자신이 실수를 했을 때 부모나 교사로부터 너그럽고 따뜻한 용서를 받아보지 못한 아이일수록 남을 따돌리는 경향이 크다"며 "아이의 공격심리가 발동되지 않도록 주변 어른들이 수용과 배려의 법을 가르쳐줘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