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쌓아놓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꼭 필요한 물건이라면 다행이지만 쓸모도 없는 물건들을 잔뜩 모아 놓는다면 문제다. 쓸모없는 물건을 '언젠가 필요할 텐데…'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못 버리는 것도 일종의 병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의외로 자주 보인다. '강박적 저장증후군' 또는 '저장 강박장애'라고 불리는데, 최근 뇌의 특정 부분이 손상되는 경우에 이런 증상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다소 생소하게 들리지만 한편으론 고개가 끄덕여지는 강박적 저장증후군에 대해 알아본다.
30대 초반의 샐러리맨 H 씨는 주위 사람들에게 '좀 치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무실 책상 위를 거의 창고 수준으로 신문과 잡지에서 스크랩한 것이며 신문, 잡지 등을 잔뜩 쌓아두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상사한테서 자주 지적을 받곤 한다. 하지만 그때뿐 버리려고 하면 '언젠가 볼 일이 있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쌓아놓게 된다. B 씨는 불필요한 문구류를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독특한 버릇이 있다. B 씨의 책상과 서랍 속에는 지우개나 볼펜, 볼펜 심, 형광펜, 메모지, 스테이플러, 스테이플러 심 등의 온갖 문구류가 한두 개씩도 아니고 가득 들어 있다. 이 중에는 쓸 수 있는 것 외에 닳은 볼펜 심, 나오지 않는 형광펜처럼 쓸 수 없는 것들까지 포함돼 있어 얼핏 보면 쓰레기통 수준으로 보일 정도다. B 씨는 자신이 쓰던 문구류는 물론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도 눈에만 띄면 '어딘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모아놓는다. 이 때문에 B 씨 외의 다른 사람들은 필요한 문구류를 찾을 때 쉽게 눈에 띄지 않아 불편을 겪기도 한다.
B 씨는 사무실뿐만 아니라 집에도 이미 많은 문구류를 모아두고 있다. 이렇게 사무실과 집에 이미 다양한 문구류가 충분히 있는데도 주말에 마트에 가면 특별히 살 게 없어도 습관적으로 문구코너에 들른다. 그리고는 '나중에 쓸모가 있겠지'라는 생각에 꼭 문구류를 사오곤 한다.
H 씨나 B 씨처럼 나중에 다 쓸 데가 있다는 생각에 불필요한 것을 버리지 못하는 증상을 의학적으로는 저장 강박장애라고 한다. 저장 강박증후군이라고도 한다.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쓸데없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저장하고 △생활공간이 잡동사니로 가득 차서 원래의 용도로 쓰이지 못하는 경우 △심해지면 저장 강박증세로 인해 불편함, 불쾌함을 느끼는 것이 특징이다.
자신은 하고 싶지 않은데도 계속 반복적인 행동을 하는 강박행동, 반복적인 생각을 하는 강박사고를 보이면 강박장애를 의심해 봐야 한다. 강박적인 행동이나 사고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고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저장 강박장애처럼 쓸모도 없는데 뭔가를 계속 저장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주변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경우 외에도 조금이라도 비뚤어진 것을 그대로 두면 불안해서 책이나 가구 등이 반듯하게 있는지 자꾸 반복해서 확인을 하는 경우, 손을 지나치게 자주 씻거나 목욕, 집안 청소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하는 것도 모두 강박장애의 증상들이다. 또한 외출할 때 문이 잠겼는지 너무 여러 번 확인하는 경우, 자신도 모르게 성적인 상상이나 성기를 자꾸 떠올리는 경우, 특정 숫자를 보면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이런 숫자가 연상되는 모든 일을 피하는 경우도 강박장애에 속한다.
저장 강박장애 환자들이 모아두는 물건은 저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영수증이라면 무조건 보관해 두어야 안심이 돼서 5년 전의 카드 영수증까지 버리지 못하고 보관을 하는가 하면, 나중에 보지도 않으면서 신문이나 잡지에서 스크랩한 것을 버리지 못하고 정리가 안 될 정도로 쌓아두는 경우도 있다. 또는 쓸모없는 티켓, 고장난 장난감을 가득 모아두기도 한다. 이로 인해 주변이 정리가 안 되는 것은 물론 쓰레기에 가까운 물건인 경우 위생에도 문제가 있다.
저장 강박장애의 원인은 현재로서는 가치판단 능력과 의사결정 능력의 손상 때문으로 본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버릴지 아니면 보관할지를 결정하는 데는 두 가지 기능을 필요로 한다. 그 물건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과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이 단계에서 쓸모가 없는 사소한 물건인데도 보관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거나, 어떤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저장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뇌의 전두엽 부위가 제 기능을 못할 때 저장 강박장애를 보이는 것으로 규명됐다. 세브란스정신건강병원 정신과 안석균 교수팀이 최근 영국 런던대 정신의학연구소와 함께 저장 강박장애 환자와 정상인 2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기능성 뇌영상 촬영(fMRI) 결과, 저장 강박장애 환자들은 뇌의 특정 부분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안 교수팀은 정상인과 저장 강박장애, 결벽증 등의 그룹으로 나누어 임상 시험을 진행했다. 참여자들이 사소한 물건을 버리는 상상을 하도록 하고 뇌 영상을 촬영한 결과, 저장 강박장애 그룹은 다른 그룹에 비해 눈 바로 위의 전두엽(이마엽) 부위가 지나치게 흥분되는 상태라는 사실이 관찰되었다. 뇌의 앞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전두엽은 의사결정 능력, 행동에 대한 계획 등과 관련된 부위다.
어떤 사람들에게 더 자주 저장 강박장애가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저장 강박장애가 있으면 불필요하게 모아둔 물건들을 보이고 싶지 않아 사람을 피하게 되고, 집중력이나 결정력, 일의 진행 속도 등이 떨어지게 된다.
"다만 강박장애, 충동조절장애, 과잉행동장애, 전두엽이 손상된 환자에게 저장 강박장애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보통 저장 강박장애가 있어도 자신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자신의 생활에 지장을 주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치료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 안석균 교수의 설명이다.
보통 약물치료에서는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강박증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우울증 치료제로 개발된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를 사용해서 신경을 안정시켜 준다. 하지만 다른 강박장애보다 치료가 쉽지 않은 편에 속한다.
이와 함께 물건을 정리해서 버리는 방법에 대한 정신상담 치료를 병행하게 된다. 주변에서는 환자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물건을 버릴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설명을 많이 해주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컴퓨터 사용이 보편화된 요즘, 컴퓨터 안에 쓸모없는 문서를 잔뜩 보관해 두는 것도 문제가 될까. 저장 강박장애까지는 아니지만 전혀 불필요한 문서를 그때그때 정리하지 못하고 계속 저장해 두는 것은 문제가 있다.
평소 우표나 화폐처럼 저장 가치가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을 모아두기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리 좀 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편이라면 실제로 그 물건이 얼마나 자주 쓰는 물건인지를 한번 체크해 보면 좋다.
안석균 교수는 "한 달에 몇 번이나 사용되는 물건인지, 3개월에 몇 번이나 사용되는 물건인지, 1년에 몇 번이나 사용되는 물건인지 하나하나 구분해 보고 1년에 한 번도 안 쓰는 물건부터 분류해서 버리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