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닉 칼럼

학습부진 퇴치 주문 “난 소중하니까”---한겨레

[한겨레] 은평중 '자존감 높이기 프로그램' 주목
성격검사로 맞춤 학습법 제시하고
자신의 장점 스스로 찾아내게 훈련
칭찬받는 경험으로 아이들 기 살려

'자아존중감을 높여야 학습 부진의 늪에서 헤어날 수 있다.'
다양한 학습법과 학습이론이 넘쳐나는 요즘, '자존감'에 초점을 둔 접근이 관심을 끈다. 얼마 전 교육방송(EBS)이 방송한 다큐멘터리 '아이의 사생활-자존감의 비밀'에서 송인섭 숙명여대 교수는 "공부를 잘하려면 우선 자존감부터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 특히 '학습부진아'를 분석할 때 자존감을 열쇳말로 삼는 것은 교육학계에서는 이미 상식이다. 정종진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자존감과 학업성취도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연구결과는 미국을 중심으로 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소홀해 왔던 게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은 보인다. 특히 공부 잘하는 아이들한테만 배려와 지원을 했던 학교에서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지난해부터 학습부진 학생을 대상으로 서울의 은평중학교가 실시하고 있는 '학습능력 향상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석원(가명)이는 해야 할 일을 시간 안에 끝내는 훌륭한 시간관리 습관을 갖고 있구나. 그런데 석원아, 혹시 시험 볼 때 '아닌 것'을 찾으라는 말을 못 봐서 틀리진 않니?"

아이는 놀란 듯 임현숙 강사를 쳐다보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임 강사는 석원이에게 앞으로는 시험을 볼 때 문제의 '아닌 것'에 동그라미를 치고, 보기에도 ○와 ×를 표시하며 문제를 풀라고 조언했다. 지난 5일 은평중 상담실에 모인 다섯 명의 아이들은 그렇게 임 강사와 함께 자신의 성격 유형에 알맞은 학습방법을 찾고 있었다.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의 출발점은 성격검사 등을 통해 아이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 있다. 임 강사는 "마이어스브릭스 성격유형지표(MBTI·The Myers-Briggs Type Indicator) 검사를 통해 알아낸 학생들의 성격 유형은 이들이 평소에 보이는 학습태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며 "이들에게 맞는 학습법을 찾아 주는 데 좋은 지침이 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에스피(SP)형인 상민(가명)이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의 수업에는 잘 맞지 않는 기질이라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수업해야 집중을 잘한다. 산만하고 잡담이 많아 교실 수업을 방해해 왔던 상민이도 자기한테 맞는 방식의 수업 환경이었다면 '학습 부진'의 늪에 빠지진 않았을 거란 말이다.

그 다음으로 아이들이 훈련하는 일은 자신의 장점을 찾는 것이다. 임 강사는 끊임없이 아이들에게서 칭찬거리를 찾아낸다. 임 강사는 "나의 장점 5가지, 단점 5가지를 쓰라고 하는 과제를 내주면 장점은 하나도 못 쓰면서 단점은 10개도 넘게 쓰는 아이들이 많다"며 "성적이 모든 평가와 판단의 기준이 되는 학교에서 학습부진아들은 '잘한다'는 칭찬을 들을 기회가 없다"고 했다. 가정에서도 다르지 않다. 공부 못하는 자녀를 더 주눅 들게 하는 것은 오히려 부모들이다. 두발검사에 걸려 머리를 밀고 나온 재훈(가명)이에게 "시원해서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업 중에 임현숙 강사가 하는 말은 단 두 가지다. '인정'하는 말과 '칭찬'하는 말이다. 문제를 지적당하기만 했지 이해받은 경험이 없던 아이들에게 임 강사의 수업은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된다. 딱딱한 수업이 아니라 '집단상담'의 형태를 띠고 있는 덕이다. 임 강사는 "30~40명이 되는 교실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교사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기 쉽고 친구들이 호감을 갖고 먼저 다가서지도 않는다"며 "비슷한 고민과 문제를 가진 친구들과 모여 소통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감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실제로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은 자신을 이해시키기도 힘들기 때문에 타인을 수용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익히기가 매우 힘들다.

은평중의 '학습능력 향상 프로그램'이 특별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일반 교과 수업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는 데 있다. 학생들은 다른 친구들이 교실에서 교과수업을 할 때 상담실로 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 학교 양정순 진로상담부장은 "학습부진 학생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사회과 몇 단원의 수업이 아니라 그 수업을 소화할 수 있는 기초체력이다"며 "이것을 길러주는 것도 교과수업만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은평중은 이 밖에도 다양한 이유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집단상담 프로그램과 개인상담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5년 전 교육복지 투자사업 시범학교로 선정돼 받은 예산이 있었기에 상담 기능을 이만큼 키워 왔지만 예산이 끊긴 올해도 상담 사업에 대한 열정과 투자는 여전하다.

상담실로 불려오면 '무슨 잘못을 했나' 주눅부터 드는 학생들과 달리, 쉬는 시간이면 상담실을 자발적으로 찾아와 진로, 학습, 또래 관계 등 다양한 고민거리를 풀어놓는 은평중 학생들, 이들은 자존감의 중요성에 눈뜬 학교에서 성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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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08-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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